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딘 헤스 (문단 편집) == 한국과의 인연 == || [[파일:Lieutenant_Dean_Hess,_Syngman_Rhee_and_his_wife_Francesca_Donner.jpg|width=100%]] || || [[이승만]] [[대한민국 대통령|대통령]]이 헤스 [[중령]]에게 [[은성훈장|은성무공훈장]]과 [[대한민국 공군]] [[조종사]] [[휘장]]을 수여한 뒤 [[프란체스카 도너|프란체스카]]와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. ||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다름아닌 [[6.25 전쟁]]. 전쟁 이전에는 [[이승만]] 정권의 호전적인 태도를 우려하여 무리한 군사원조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했던 미 정부는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본격적으로 지원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.[* 이승만 정권이 호전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내비쳤기 때문에 공세적으로 운용이 가능한 무기를 제공하면 북침할것으로 판단하여 방어용 무기만 제공하고 있었다. 게다가 공군의 경우는 그나마 준 정찰기를 타고 월북하는 사고까지 터지는 바람에 '줘봐야 북한으로 튀는구만!'이라면서 더더욱 암울한 입장이 되었다.][* 사실 나토군을 위한 서유럽의 재건 순위가 우선인 점도 컸던 터라 원조순위가 최하위였던 한국에게 공여해줄 여력이 없었다. 당장 바다 건너 주일미군은 전차는 켜녕 지프 가동률 조차도 50%에 그치는 수준이었으니..] 그리고 한국 공군을 '''지원'''할 제6146군사고문단을 창설하면서 그 책임자로 임명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. 이 6146군사고문단은 대한민국 공군 재건을 위한 작전을 한판 승부(Bout One)라 이름짓고 부대명도 이 이름을 따서 "바우트 원 대대"라는 이름으로 불렀다. 초기 군사고문단과 한국 공군의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으나 딘 헤스 소령은 부하들을 설득해서 이 [[바우트 원]] 대대를 끝까지 키워내고 말겠다고 결의했다.[* 한때는 지상요원 13명과 헤스 소령을 포함해서 조종사가 2명에 불과할 때도 있었을 정도.] 그러나 상황은 날로 악화되었고, 결국 미군은 바우트 원 대대를 해체시켜서 미 공군에 전속시킬 것을 결정한다. 하지만 그는 "우리가 탈 비행기가 없어진다면, 저희들은 육군에 입대해서 조국을 위해 싸울 겁니다"라고 말하는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애국심에 감동받아 상부에 부대의 존속을 결사적으로 주장했고, 그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[[바우트 원]] 대대는 존속할 수 있었다. 이후 그는 모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직접 한국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250여 회의 출격을 했다.[* 다른 부하 교관들은 한국 조종사들과 함께 전투비행을 하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다. 물론 헤스 소령 자신도 처음엔 무척 당황했다.] 특히 기수에 '신념의 조인'이라는 노즈아트가 그려진 18번기를 조종함으로써 한국 공군의 역사로 남게 되었다. 딘 헤스 소령 이외의 조종사들도 머스탱을 타고 출격했었고 그중 한 명인 딘 크로웰 대위가 실종되었다. || [[파일:20091027011347_1.jpg|width=100%]] || ||{{{-1 대한민국 공군의 전설적 기체. [[딘 헤스]] 소령 전용 18번기 '信念의 鳥人'[* 사진 가운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인물이 딘 헤스 소령이다.]}}}||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